기독교인과 진보정치

 

 

김민호 목사


빛이 프리즘이라는 도구를 통과하면 여러 가지 색깔로 나눠진다. 이것을 스팩트럼(spectrum)이라 한다. 스팩트럼은 빛이라는 하나의 본질이 다양한 색깔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다양한 색깔이 나타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들도 다 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빛이라는 본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색깔이 있다. 검정색이다. 비록 검정색이 색깔의 범주로 사람들에게 여겨지지만 그 색깔의 의미는 항상 빛이 없음을 뜻한다. 때문에 검정색은 빛의 스펙트럼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마치 꽃이라는 ’() 안에 다양한 ’()으로서의 꽃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꽃을 본질’(보편자)이라고 한다면, 개나리, 진달래, 장미, 국화 등은 꽃의 스펙트럼’(개별자)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식물이라도 꽃의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꽃일 수 없다는 말이다. 다양성은 본질을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본질 안에서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 민감하다. 기독교는 다양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다양성이 하나의 본질에서 나왔는지 민감하게 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논리와 사상으로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해도, 그것이 성경의 본질을 떠난 세상 철학이라면 결코 같이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성경의 본질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빛과 어둠”(고후 6:14)의 대립이요, “그리스도와 벨리알”(고후 6:15)의 대립이요, “성전과 우상”(고후 6:16)의 대립으로 본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2:8)고 했다. 본질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 경고는 교회사 안에서 항상 진리였음이 입증되었다.

 

영지주의는 플라톤주의 이원론을 본질로 삼아 성경을 해석한 이단이었다. 여기서 극단적 금욕주의와 극단적 방종주의가 나왔다. 신비주의는 신플라톤주의를 본질로 삼아 성경을 해석한 이단이었다. 여기서 자기 신격화를 위한 수행과 뉴에이지가 나왔다. 이런 모든 이단들은 당대에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성경을 본질로 삼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을 어둠으로 인도하였다.

 

이 정도면 기독교와 진보주의가 과연 함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충분한 대답이 됐으리라 생각된다. 진보주의가 비록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아름다운 구호를 사용하지만 그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고, 공평하게 살자는 주장은 사도행전 2장의 유무상통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사회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더 성경의 스펙트럼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나왔다. 그러나 비록 성경말씀으로 주장할지라도 본질이 철학과 속임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는 부정 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스펙트럼 안에 들어가지 않다. 도리어 인본주의 스펙트럼 안에 들어간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진보주의 본질은 무신론과 진화론, 인본주의다. 이 본질에서 프리즘을 통과한 사상들이 바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해체주의, 젠더 이데올로기, 헤겔주의 등등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들이 성경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해도 본질은 세상 철학과 헛된 속임수다.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여 사로잡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진보사상과 같이 할 수 없다.

 

간혹 사람들은 보수우파가 너무 형편없기 때문에 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동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동족방뇨’(凍足放尿/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다. 한 쪽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또 다른 극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율법주의가 잘못 됐으니 무율법주의로 가자, 신비주의가 잘못 됐으니 교조주의로 가자는 논리다. 전형적인 철학의 논리다. 오류에서 또 다른 오류로 비약(飛躍)하는 논리다. 역사는 이 과정의 반복이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사회, 국가가 자멸하는 전형적인 궤도였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태도를 철저히 경계했다. 그들은 철학이 가져다 준 오류를 철저히 제거하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돌아갔다.

 

작금의 혼란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좌우의 대립 가운데 극단에서 극단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라는 기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면 우익 쪽에 있는 사람은 우리를 좌익에 기울어졌다고 볼 것이다. 반대로 좌익 쪽에 있는 사람은 우리를 우익에 기울었다고 볼 것이다. 이것이 개혁파이고, 전통적인 보수정치의 숙명이다. 이는 마치 율법주의자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무율법주의자처럼 보이고, 무율법주의자들이 볼 때 지나친 율법주의자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착시다. 기독교인들은 우익에 설 것인지, 좌익에 설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으로 균형을 잡고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다. 거기서 복음의 위대함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