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에 대하여 바르게 알자


김민호 목사

 

성찬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성찬의 몇 가지 학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천주교의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이다. 화체설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찬을 시행하는 가운데 신부의 축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미신적(迷信的) 주장이다.

 

두 번째는 공제설(共在說,coexistentialism)이다. 이 학설은 마틴 루터가 주장한 것이다.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안에, 밑에, 함께(in, undre, along with)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있다는 주장이다. 공재설의 핵심은 성찬의 신비를 지켜내고 가톨릭의 미신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 가톨릭의 미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천주교는 집례 하는 사람(신부)의 영적상태나 받는 사람(신자)의 신앙에 관계없이 성례전 집례와 동시에 은혜가 기계적으로 주입된다고 주장한다면, 루터는 받는 사람의 신앙(믿음)이 필수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쯔빙글리가 주장한 기념설이다. 기념설은 가톨릭의 미신에 대해 극단적 반대로 간 나머지 성찬의 신비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주장이다. 때문에 기념설 성찬에는 어떤 신비도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감상적으로 기념하는 정도로 끝난다. 애석하게도 상당수의 장로교가 칼빈이 아닌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르고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우리 개혁파 교회가 주장하는 영적 임재설이다. 영적 임재설은 성찬의 신비를 결코 상실시키지 않으면서 가톨릭의 미신을 정확하게 극복한 교리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첫째로 표징에 대해서 주의를 게을리 하는 나머지 표징이 나타내는 신비를 표징과 완전히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둘째로 표징 자체를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나머지 그 속에 담긴 신비를 조금이라도 흐리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적인 성찬은 신비는 살리고 미신은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면 신자가 성찬에 참여할 때, 어떻게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신비를 경험하면서 미신에 빠지지 않으면서 믿음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는 영적 임재설이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영적 임재설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거나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성찬의 신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감사와 애통이 주를 이룬다. 예수님께서 재정하신 성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도의 영적 양식으로 삼록 하는 신비한 예식이다. 칼빈은 성찬의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지적해준다.

요컨대, 떡과 포도주가 육체의 생명을 지탱시키고 유지시켜 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혼에게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 고백과 직결된 성경구절이 바로 신명기 8:3의 말씀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의 이 말씀을 성찬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기적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자신이 광야에서 만나를 베풀었던 모세와 같은 메시아라고 스스로를 입증하셨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고 선언하신다. 광야의 만나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5)고 선언하시면서 성찬의 의미를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라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며, 결코 애굽의 양식(옛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구약의 성례로서 생명나무의 실과와 선악을 아는 실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영적 임재가 강조된다. 성도는 손으로 떡과 포도주를 잡는 것을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을 묵상한다. 믿음으로(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빵을 입에 넣고 씹으며 삼키면서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이 살과 피가 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소화 할 때,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합됨(신비적 결합)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임재 하여(빵과 잔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에 연합시킴으로 믿음을 견고케 한다.

 

두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이 보이는 말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이 읽는 말씀, 혹은 듣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보이는 말씀이다. 보이는 말씀이란 글이나 음성으로 성도들에게 인식하도록 하는 성경과 다르다. 눈으로 봄으로써 복음을 인식하게 한다는 말이다. 성찬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지 깨닫게 한다. 빵을 냄새 맡고, 입으로 맛있게 씹어 먹으며, 그 후에 삼켜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주린 영혼에게 구미를 당기게 하는 향기를 내며 먹음으로 즐겁게 소화를 하여 살과 피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만 하고 먹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깨닫게 한다. 칼빈의 주장을 들어보자.

떡이 보는 것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먹어야만 몸에 영양이 공급되는 것처럼, 영혼도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깊이 참여하져야만 비로소 그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성찬을 집례 할 때마다 설교를 통해서 성찬의 이러한 신비한 유익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찬의 유익이 보이는 말씀이 되어 성도들에게 말씀처럼 유익이 되고 궁극적으로 말씀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퍼킨스의 주장처럼 성찬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을 통해서 성도가 한 몸이라는 점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에 같이 참여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을 하실 때, 하나의 빵을 찢어서 나누신 것은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 혹은 연합됨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임을 고백하며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심리적 하나 됨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령의 하나 됨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적 프로그램보다 탁월한 교회의 일치를 일구어 낸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자. 칼빈은 성찬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찬의 약속들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그저 겉모양과 단순한 지식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을 진정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다. 성찬은 은혜가 성도에게 주어지도록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성찬의 은혜가 주어지는 방식은 퍼킨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매번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열매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찬의 효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웬의 주장을 하나만 더 인용하자.

우리가 [성찬] 규례에 가치를 별로 부여하지 않고 성찬을 통해 그리 유익을 얻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와 갖는 특별한 교제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